__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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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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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617

그때 우리는 저녁이면 프로콜 하렘이 부른 원곡을 들으며 지갑을 털어 바에서 맥주를 마시곤 했다. 세상은 여전히 수상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막무가내였고, 흐린 날 가끔 AFKN에서 그 곡이 나오면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의기양양해 했다.

 

몇 년 후 어느 날 저녁 우연히 혼자 데이비드 렌쯔가 연주하는 그 곡을 들었을 때 나는 알았지.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프로콜 하렘의 격렬함과 아득함 대신 기억을 반추하는, 그러나 여전히 잊혀지지는 않은 그 뜨거움이 묻어 있는 데이비드 렌쯔의 정갈한 새벽.

 

뜨거움과 서늘함. 나는 불 속에서 끄집어낸 칼날처럼 조금씩 식으며 단단해지고 있다.

 

David Lanz I A Whiter Shade Of Pale

 
021114

창밖을 보면 언제나 프라하의 하늘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프라하의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왜 프라하인지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고 혼자 중얼거리는 수 밖에는. 프라하.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분다.

 

조직은 이미 오래 전에 나를 잊은 게 분명하다. 프라하에 파견된 특수비밀요원의 존재감이란 하여튼 미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정권이 바뀌어 분주히 감사 준비를 하다가 문득 발견하겠지. 어. 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두운 하늘. 프라하.

 
021122

먼지는 필연적이다. 먼지와 싸워서는 안 된다. 매일 매일 거울을 닦아도 먼지는 다음 날 아침이면 거울 위로 의기양양하게, 뻔뻔하게 내려앉아 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것이 먼지이고 그 먼지를 말 없이 또 닦아내야 하는 것이 결벽적인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6조 혜능. 우리들 중 혜능이 가능한 인간은 없다. 그는 혜능이고 우리는 다만 결벽증에 걸린 인간일 뿐이다. 거울아, 거울아. 이제는 내 먼지 앉은 마음을 네가 닦아다오. 내 마음의 먼지도 하염없단다.

 
021203

고통은 삶의 한 형식이 아니라 모든 형식이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021207

어둠에 잠긴 빈 들판에 서서 나는 잠시 외롭더라. 돈으로 칠갑한 석조 교회 위로 걸린 알록달록 반짝이는 꼬마전구들 아래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우두커니 서서, 반짝이는 꼬마 전구들과 등 뒤로 누워 있는 검은 들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나는 잠시 외롭다는 생각이 들더라. 누가 세팅해 놓았는지 촌로 하나가 쉬엄쉬엄 걸어와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지나가대. 왜. 날보고 어쩌라고.

 

멜랑꼴리가 달리 멜랑꼴리겠는가. 인생이 통속적이라고 할 때 그 통속성이 달리 통속적이겠는가.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기호 1번을 달고 나오는 놈들을 쳐다보면, 나와서 10년 전에도 해먹었고 10년 뒤에도 짤 없이 해먹고 가는 걸 보면, 꼭 세월이 멈춘 것 같다.

 

기호 1번. 멜랑꼴리입니다. 저 아시죠. 그럼요. 오늘의 여러분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굽니까. 저 아닙니까. 제가 아니면 니가 밥술이라고 떠먹고 살았겠습니까. 세상이 변한다지만 그래도 기호 1번 저, 멜랑꼴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니가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때부터 저, 쭈욱 1번 먹고 살았습니다. 너도 알잖아. 나만한 놈 없다는 거. 푸코고 데리다고 쓰리빠고 간에 다 쑈라니까 쑈. 랄랄라ㅡ.

 
021207

날이 흐리네. 눈이 올란가 싶어 15도 각도로 갸우뚱 고개를 꺾고 빤히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세계란 오호, 세계의 직무유기입니까. 테이블 위의 식은 커피잔이 어어, 하며 기우뚱 흘러내리다 테이블 난간을 잡고 간신히 매달리는데 뒤이어 김현ㅡ 문학전집 제10권「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가 주르륵 미끄러지며 커피잔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때리는 장면이란 또 어떻습니까. 졸지에 다갈색으로 물들어버린 시칠리아의 암소. 역시 고개를 모로 꺾어 기울어진 세계를 빤히 쳐다봅니다. 이것들이 도대체 왜 이러지.

 

어떻습니까. 한번 갸우뚱 고개를 꺾고 세계를 살짝 기울여 볼 수 있겠습니까. 기울여 넘치는 잔을 쏟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030124

마음이 타고 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그러나 타고 난 다음에도 남아 여전히 조용히 반짝이는 내 마음의 서늘한 불씨들이여. 책장을 넘겨보라. 또 무엇이 나오는가. 검붉게 타오르는, 눈 내리는 숲의 기억이다.

 
030209

삼십 삼 년을 살았으니 지겨울 만도 하지. 하긴 이십 년쯤 살던 때부터 무료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유명한 중들은 대개 돈오하고 나서는 내려와 머슴일이나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던데. 어느 날 누가 그를 알아보고 아니, 이거 그 유명한 김샘 아니십니까. 여기서 왜 이런 허접한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한다는 말이 꺼져, 상관하지 말고.

 

중국을 통일했던 모 황제는 그 후 심드렁해져 어느 산중 오두막에서 홀로 장작이나 패면서 남은 생을 보냈다는 말도 있고. 함께 일을 도모했던 개국공신들이 찾아와 제발 궁으로 돌아가십사 하니까 장작 패던 도끼를 쳐들고는, 재미없어 이젠. 자꾸 찾아오면 니네들 확 죽여버린다. 그러고는 투덜대며 소금을 뿌렸대지 아마.

 

본래진면목이란 본시 무심한 것인가.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다리 난간을 부여잡고 우리는 버틴다. 지나가는 물고기가 그러더군. 호오. 니네는 왜 지느러미가 없니. 그래서 내가 분해서 대꾸해줬지. 꼬리뼈는 있어.

 
030217

봄이 어떻게 오는지 나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별 도움이 못 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난감하다. 시험을 치면 언제나 틀리는 문제가 있다.알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공식을 외우고, 손바닥에 볼펜으로 적어놔도, 이번에도 역시 3번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소용없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 문제와는 아주 친해지는 것이다. 심오하여라.

 

오래동안 알고 지낸 주근깨투성이 계집아이처럼 다시 봄이 온다. 봄아, 안녕ㅡ. 이번에도 3번이니.

 

Paul Simon I Born In Puerto Rico

 
030224

동지들, 모두 무사하신가. 봄이 오고 있다. 존재의 변경으로부터, 이미 폐허가 된 시외곽의 방어선을 하나씩 돌파해오는 정규군처럼. 봄의 전위는, 동지들이여, 날카롭고 단호하다. 우리의 위대한 투쟁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동지들의 헛된 피를 원하지 않는다. 무기를 내려놓고 각자 최선을 다해 위치를 이탈하라. 생각을 정돈하여 이제 길을 내야 한다.

 

우리는 패배했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투쟁 속에서 검게 타 한 줌의 재로 남은 우 리의 청춘도 한낱 루머에 불과하지만은 않으리라. 그리하여 동지들이여, 모두 살아남으라. 살아남아 우리의 투쟁이, 우리의 피와 눈물이, 우리 영혼의 끊어질듯 팽팽한 날갯죽지 위로 깊게 패인 우리 반역의 낙인이 마침내, 끝끝내 기쁨의 눈물로 되살아오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유일한 패배는 죽음 뿐이다.

 
030225

하늘 어둡고 다시 날이 저문다. 텍스트의 키워드는 반복과 모순. 이것은 세계를 향해 날리는 나의 모르스 부호이다. 녹슨 총과도 같은 세월의 둔중함. 내가 침몰한다 해도 나의 낡은 이니그마는 깊은 바다 속에서 여전히 잠든 이 세계를 향해 반복과 모순의 모르스 부호를 점점이 날릴 것이다. 지상에 내려앉지 못하고 녹아 사라지는 흰 눈처럼. 우주를 향해 끝없이 타진되는 세티의 응답 없는 메시지처럼.

 
030317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나는 강가에 앉아 파지들을 태워버리듯 기억들을 흘려보낸다. 나의 기억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의 기억. 등 뒤로 조용히 물에 잠기던 나의 푸른 사막이여. 타오르는 기억, 라딕.

 
030403

봄밤. 아주 먼 곳의 기억ㅡ 은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기억은 언제나 아주 먼 곳으로부터 온다.

 
030410

그해 봄,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나는 퇴원했다. 세계는 무사했다. 라만차의 늙은 기사. 그로부터 십 년 동안 나는 풍차를 돌리며 밀을 빻았다. 내가 빻은 밀은 아무도 먹지 못했다. 나는 아무도 먹지 못하는 밀을 빻으며 살았다.

 

지금 나는 풍차 안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어지럽지는 않다. 풍차야, 돌아라. 바람아, 불어라. 나는 아무도 먹지 못하는 밀을 빻는다. 이것은 나의 복수다.

 
050305

물거품 같은 마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난감하지.

 

하루 세 번 식후 30분 후에 드시오. 음악을 듣는 것이 때로는 약을 먹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약을 먹지 않으면 다시 물거품으로 변해버린다는 SF 페어리 테일 같은 건데. 문제는 그 도시에서는 아무도 약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물 속에 가라앉은 잊혀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페어리 테일을 가장한 8미리 호러. 애비ㅡ.

 

Yo-Yo Ma & Alison Krauss I Simple Gifts

 
050323

쓸쓸한 봄밤. 무릉 240km. 아직 멀었구나. 얼마나 더 가야 고향의 꽃향기를 다시 맡을 수 있을까. 살아서, 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단함이여.

 

You Eun-Sun I Rembrance

 
050419

주적 개념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연식하고 비례해서 늘어난다는 말이지. 그래 생의 하프라인을 넘어서면 그 모든 적들의 배후랄까 하는 것의 역사적인 실체를, 또는 존재론적인 실체 같은 것을 비로소 꿰뚫게 된다는 건데.

 

그때 함부로 내 뺨을 때리며 야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던 그 수학 선생의 머리를 내가 화분으로 찍어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지금도 나를, 우리를 짓누르는, 우리의 가계부를 왜곡하고 그 피 묻은 돈으로 자신들의 교양과 마누라의 그랜저를 사고 새끼들을 식민지 종주국에 유학 보내 대를 이어 해먹는 그 모든 수학 선생들의 머리를 차마 찍어버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이 화분에 되지도 않는 꽃 따위를 심는 마음을 나는 알지. 뒷산 가득 심어 놓은 대나무밭이 겨울 바람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울 때, 기회주의자들이 밤새 베개를 뒤척이며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In Flames I Artifacts Of The Black Rain

 
050518

마음이라는 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다시 생기는 거라고. 그래. 우리는 없는 마음 속에서 산다. 없는 마음 속에서, 없는 도시에서, 없는 지하철을 타고, 없는 김밥을 먹으며, 산다.

 

그러나 없는 마음을 적셔오는 이 고통이여. 없는 마음으로 사는 자의 슬픔을, 강철로 만들어진 자의 없는 심장을 도려내는 그 고통을, 그 견딜 수 없음을, 너희는 아느냐.

 
050602

장마가 지면 또다시 모든 것들이 우우우 떠내려가버릴까요. 넥스트 시즌, 오퍼레이션 싹쓸이. 피가 모자라시는 언니들은 피박 주의해주시고. 하긴 그게 주의한다고 해서 면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사흘 낮 사흘 밤 퍼붓는 폭설 아래 사람들의 발자국도 모두 덮혀버리고. 이윽고 빈 뜰에 홀로 남아 있는 날아가는 새의 발자국. 저 발자국을 따라가면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Black Hole I Rainy City

 
050607

노를 저어, 한 뜸 한 뜸, 조각난 생을 꿰매고 있다. 마스터 어브 조각 보자기. 살아서는 더운 밥을 담고 죽어서는 길게 펼쳐 예쁜 수의로 쓸 거다. 부럽지.

 

Maria Farantouri I Wenn Die Kraniche Ziehen

 
050616

이보게, 친구. 분노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분노는 오직 스스로를 파멸시킬 뿐이지. 그러나 분노가 없는 세속의 인간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불살라 한 생의 어둠을 밝히고 있지.

 

벤줜스 이즈 마인. 복수는 나의 것ㅡ 이네.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

 

Sentenced I Vengeance Is Mine

 
050624

그래도 풍차를 봤으니까, 됐다. 나는 이 세상에 풍차를 보러 온 거니까.

 

Ayub Ogada I Kothbiro

 
050728

기억과 생은 반비례한다. 그러므로 나의 기억은 한 발 한 발 생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종말의 로그 파일 같은 것이다.  

 
050801

내게 있어 행복했던 날들의 기억은 그녀에 관한 기억이다.

 
050805

단종된 인간. 재고 없음. 품절이다. 더 이상 나를 찾지 마라.

 
050830

세상의 끝으로 가면 행복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거기가 세상의 끝이니. 나는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갔다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Djivan Gasparyan I Cool Wind Is Blowing

 
051118

그래. 이제 잠들거라 아가야. 바둥거려도, 소용없다. 그런데 참 아가야, 이것이 영원한 잠이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단다.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렴. 아가야, 너는 엄마의 자랑이란다.

 

Joanne Shenandoah I Peace And Power

 
051221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 할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입은 녹슨 총신 끝에 달려있는 소음기와도 같다. 죽음의 흔적만이 있을 뿐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입속의 검은 혀. 

 

그러나 먼 곳에서, 나는 문득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잊어버린 것이었다.

 
051226

한 생의 눈이 내리고 있다ㅡ 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은빛으로 반짝이며 날리는 눈들. 저게 다 마침표야. 나는 저 마침표 앞에 있었던 그 수많은 사라지고 없는 날들을, 한 생의 기억들을 모두 기억할 수 있지.

 

한 생의 여름. 백 년의 생. 천 년, 아니 만 년의 생이라고 해도 끝내는 역시 숨을 죽인 채 그렇게 조용히 한 생의 눈이 내리는 것을 지켜보야야만 하는 것일까.

 
060103

지나간 날들은,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꿈의 잔영들, 안개처럼 주위를 맴도는 흔적들, 그 끊임없는 진행형의 기억들을 되새김질 할 뿐이다. 내가 염소냐. 그렇다. 검은 염소. 스스로의 끈을 입에 물고 충실한 개처럼 주인을 찾아가는. 기특하여라. 조금만 더 가면 십우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

 

그런데, 염소는 어떻게 타는 거냐.

 
060130

그렇군요. 그해「분말 코카인이 내리던 하루」우리는 거국적으로 조지 윈스턴을 들었더랬군요. 삐삐를 들고 학생회관 1층에 있었던 공중전화박스를 찾아 6층에서 구르듯 뛰어내려가곤 했던 그때 말입니다. 이거 참.  

 

탄저병이여, 다시 오라ㅡ 고 할 수도 없고. 우리에겐 이미 조류독감 같은 것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언젠가, 또다시 하늘에서 눈으로 가장한 분말 코카인이 탐스럽게 내리면, 그땐 같이 죽어버릴까요. 광 팔고 죽으면 요즘은 얼마 준답니까.

 

George Winston I Thanksgiving

 
060508

집으로 돌아갈 준비는 다 됐는데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질 않는다. 인적이 끊긴 어두운 버스 정류장에 서 우두커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미안하다.   

 

미안해, 라고 나는 작게 속삭인다. 그래도 나는 꼭 돌아갈 거야.

 

Asia I Ready To Go Home  

 
060605

쇼당이라고 들어보셨는가. 자, 받아라. 여기 팔 광(光)이 있고 팔 십(十)이 있다. 내가 만약 팔 십 속의 새들을 풀어준다면 너는 능히 날 수 있겠느냐.

 
060626

아. 제가 아까 닫힌 미로 안을 달리는 검은 쥐에 대해 말하려고 했었지요. 처음에는 출구를 닫아 놓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당연히 문은 없지요. 그렇게 마흔 두 번을 하고 마흔 세 번째는 출구를 열어 놓는데 그때는 미로의 끝에 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쥐는 더 이상 거기까지 가보지 않습니다. 검은 쥐의 상식입니다. 그게 검은 쥐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실험자 역시 미로 속에 넣어 놓고 마흔 두 번만 돌리면 그렇게 되지요.

 

막힌 골목입니다.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이 뒤엉켜 달려갑니다. 미친 듯이. 공포란, 그것이 이미 백 마흔 두 번째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달려라, 검은 쥐.

 

Nighwish I Planet Hell

 
060711

태풍이 오고 있습니다. 그해 여름, 태풍이 오는 바닷가에 서서 기꺼이 쓸려 내려가기를 원했던 그의 영혼은 오늘도 불편한 몸을 뒤척이며 조용히 바람이 부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차갑게 식은 얼굴.

 

어쩌면 그때, 그의 영혼은 이미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저 눈빛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그의 오랜 기억이었을 뿐.

 
060715

중국집에서 저녁에 짜장면을 먹고 있는데, 꼬마 하나가 밖에서 놀다가 물을 먹으러 뛰어 들어온다. 아줌마가 저녁은 먹었냐고 물으니까 꼬마가 말한다. 엄마 아직 안왔어요ㅡ.

 

아직이 아니라, 엄마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Yann Tiersen I Mother's Journey

 
060718

나는 미궁과도 같은 기억 속을 오랫동안 헤매고 다닌 끝에 결국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날 그 어스름한 술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지나간 한 시절의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던 그날의 기억을 복원할 수 있었다. 그것은 King Diamond가 아니라 Kingdom Come이었다.  

 

비밀이 없는 자는 재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프고, 기억을 잃어버린 자는 거울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정상적으로 로그인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Kingdom Come I What Love Can Be

 
060818

AH-64AH-1S라고 할 때의 그 A는 어텍의 머릿글자입니다. 헬기 기종 중에서도 특히 공격형 헬기에 붙이는 약칭이지요.

 

타입이 전투형인 인간ㅡ 이라는 게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 인간은 모델 자체가 전투형인 겁니다. 세탁기 돌리고 연말 공제액 계산하고 그런 거 못합니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적들을 향해 화염병이나 소주병 따위를 날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언필칭 세계와 맞서 싸운다는 식입니다. 언제나 싸웁니다. 왜냐하면 모델 자체가 그렇게 디자인 되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잘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 그나마 주머니에 탄창이 몇 개라도 남아 있을 때 그만 깨달으면 좋으련만.

 
061018

배가 항구를 떠나 바다 속으로 점차 멀어져갈 때, 우리의 몸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검은 바다를 향하고 있으나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떠나온 저 항구의 작고 따뜻한 불빛들을 향해 오래도록 서 있으리니.

 
070424

찬란한 봄날에, 나이 들었나 보다, 이런 멜랑꼴리라니. 그래도 역시 가슴을 저며오는 이 봄날의 천진무구한 신파여. 인사를 하자. 안녕.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나도 참, 안녕하단다. 그러나 나의 안녕은 왜 언제나 죄스럽고 도리 없이 미안하기만 한 것인지. 미안하다, 안녕해서. 안녕해서, 내가 미치겠다. 나의 안녕이 나의 무덤이다.

 
070131

나아가야 할 때를 알고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인생의 기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생의 전부가 물러나 있어야 할 때라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Jin-Roh I Pride

 
070417

각혈의 3월이 가고 봄이 오규원 식으로 천천히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임의동행 형식으로 속수무책 끌려가는 봄 앞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입을 달싹거리는 그 어린 봄 앞에서ㅡ 무지몽매, 비감이 앞을 쫌 가립니다. 여보. 비감이 앞을 쫌 가려도 오늘 저녁 요가는 빠지지 마세요. 팔만 원이나 내고 끊은 건데. 그리고 제발 담배는 베란다에 나가서 좀 피우세요.

 

안녕. 인사를 하자, 비감이여. 비감하게. 너나 나나 할 줄 아는 것은 비감함의 제스처 뿐. 이제는 기침을 해도 더이상 피가 섞여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나중에 사식 챙겨서면회는 꼭 가도록 하마. 잊지 않고.

 
080218

나는 강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강가에 우두커니 앉아,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홀린 듯이 넘실넘실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어느날 문득 나는 흘러가는 것은 강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염없다는 말이 있다. 가끔 이 말을 써 놓고 속으로 가만이 발음해 보면 정말 하염없다는 생각이 든다.

 
080925

마에스트로,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제는 마음만 아파옵니다. 꼭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것만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에스트로, 음악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음악을 끄거라. 음악을 듣는 일이 괴로움이 되어서야 쓰겠느냐. 차마 네 손으로 음악을 끄기 힘들다면 내가 대신 와싸다 장터에 앰프와 스피커를 내놓도록 하마.

 

만약 음악을 끈 뒤에도 마음이 괴롭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090420

제네시스를 타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과연 제네시스를 타고 라면 한 봉지에 담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스승님. 라면 한 봉지에 담긴 진실에 관한 이야기는 때로 제네시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사옵니까. 아니, 라면 한 봉지에 담긴 진실의 끝은 언제나 제네시스 아니옵니까.

 

안타깝구나, 빨간양말이여. 너는 아직도 모르겠느냐.

 
100110

꿈이 깨지 않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100120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은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Sung Eui-Shin I The Morning Of Winter

 
111024

환영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