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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Ketil Bjornstad l Minorblue Edition
 
1. The Sea I
2. The Nest
3. A Noctural Upon St. Lucy's Day, Being The Shortest Day
4. Exile
 
 
_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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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작은 상자가 있었네. 바스코 포파의 작은 상자. 학교를 그만두고 시립도서관에 진을 치고 살면서 이상의 자화상이 실린 화보를 몰래 찢기도 하고 흐린 날에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돌아다니며 과월호 문학사상 같은 걸 사모으던 시절이었네. 태풍이 오면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바닷가에 나가 밤새도록 세찬 바람에 흔들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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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먼지 앉은 서가에서 우연히 작은 상자를 보았지. 헌책방에서 오백 원 주고 산 작은 상자가 나는 너무 좋아 언제나 가지고 다녔네. 여상 다니는 S를 만나러 갈 때도 주머니에 넣어 갔고 집을 나갈 때도 수면제가 든 작은 병과 함께 책가방에 넣어 갔네. 작은 상자만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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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길은 모두 끊어져 있었네. 처음에는 오래 전에 죽은 한 여자가 먼저 세상으로 난 길 하나를 끊었고 나중에는 내가 남은 길들을 모두 끊어버렸네. 나는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네. 나도 여자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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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내게 남아 있던 마지막 길이었지만 그 길 역시 세상의 많은 길 가운데 하나였음을. 그리하여 나는 결국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을 그해 여름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퇴원하던 날 나는 알게 되었네. 나는 어른이 되었네. 작은 상자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천천히 늙어가기 시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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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01 I 1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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